“실패는 비용 아닌 정보의 축적…성공만 강요하면 혁신 못해”
◆조성호 KAIST 실패연구소장(전산학부 교수)
추격자서 선도자로 탈바꿈 위해선 시행착오 불가피
‘실패 빼앗는 사회’에선 창업·혁신연구 활성화 안돼
실패 용인 이어 연구·축적 문화 구축해야 도약 가능
AI시대엔 좌절서 배우는 인간만의 정신역량 더 중요
수정 2026-05-11 23:58
입력 2026-05-11 17:34
한영일
논설위원
영국의 가전 업체 다이슨을 창업한 제임스 다이슨은 5126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먼지봉투 없는 청소기 개발에 성공했다. 수많은 도전 끝에 날개 없는 선풍기도 그의 손끝에서 태어났다. 무수한 실패작이 그를 혁신의 아이콘으로 만들어냈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인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캠퍼스에 있는 ‘실패연구소’라는 현판은 처음 보는 이들에게 묘한 질문을 던진다. 모두가 앞다퉈 성공 신화를 내세우는 시대에 왜 하필 실패를 연구하느냐는 것이다. 조성호 KAIST 실패연구소장(전산학부 교수)은 11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성공은 포장되지만 실패는 원인이 남는다”며 “결국 실패는 비용이 아니라 혁신을 위한 정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실패를 개인의 낙오로 취급하는 문화가 국가 혁신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인공지능(AI) 시대일수록 인간이 실패를 감당하고 학습하는 능력이 국가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수재들이 모인 KAIST에서 실패란 화두에 천착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는 그동안 성공 전략은 아주 집요하게 연구해 왔다. 기업은 성공 사례집을 만들고 정부는 우수 정책만 홍보하고 대학 역시 탁월한 성과만 앞세웠다. 그런데 실제 혁신의 현장에서는 성공보다 실패가 훨씬 많다. 문제는 그 실패가 기록되지 않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어떤 선택이 왜 빗나갔는지 분석하지 않으니 사회 전체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실패연구소는 결국 그 공백을 메우는 작업을 하는 곳이다.
-그동안 어떤 활동들을 했나.
△강연이나 세미나처럼 듣는 것만으로는 일시적인 효과밖에 없다. 그래서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을 중시했다. 처음 시도한 게 ‘실패 사진전’이었다. 자신이 실패했던 순간의 감정을 담은 사진을 평소에 찍게 한 뒤 학생들끼리만 모여서 함께 이야기했다. 서로 공감이 생기면서 혼자 끙끙 앓던 학생들이 위안을 받고 회복 탄력성이 생겼다. ‘망한 과제 자랑하기’ 행사도 의미가 있었다. 매년 가을에는 1년간 실패연구소가 한 모든 활동들을 종합 정리해서 외부에 공개하는 행사도 진행해 오고 있다.
-실패 연구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우리나라는 선진국과 기술 격차를 많이 줄였고 훌륭한 연구 결과도 많다. 하지만 아직 노벨상 수준의 파괴적인 혁신은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려면 연구하는 문화와 태도를 바꿔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남들이 만들어 놓은 정답을 빨리 푸는 ‘패스트 팔로어’ 전략으로 전 세계 10위권에 올라섰다. 하지만 앞으로는 매뉴얼이 없는 게임, 즉 ‘퍼스트 무버’가 돼야 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실패와 시행착오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문화에서는 절대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없다.
-선도국가로 가기 위해 ‘실패 문화’는 필수적인가.
△그렇다. 실패를 통해 남보다 먼저 새로운 것을 깨닫고 배워내는 역량이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 시스템은 그렇지 못하다. 무조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고 실패를 기피하는 것만이 성공 공식으로 받아들여진다. 문제는 그것이 과거에는 통했지만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나 혼자 그렇게 하면 그냥 홀로 낙오되는 시스템에서 선뜻 앞서 나가기가 쉽지 않다. 우리 사회 전반의 문화 혁신이 필요하다.
-주변에서는 실패가 일종의 낙인으로 찍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선진국으로 급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효율성과 가성비였고 그게 곧 정의였다. 이 방식으로 성공한 기성세대는 이를 자녀 세대에게도 이식했다. 그래서 실패를 경험이나 자산으로 축적하지 않고 개인의 흠결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뿌리 깊다. 입시에서 떨어지면 패배자, 취업이 늦어지면 뒤처진 사람, 창업하다 망하면 무모한 사람으로 취급받기 일쑤다. 사회가 정해 놓은 경로를 한 번 이탈하면 복귀가 어렵다는 공포가 깔려 있는 셈이다. 이 같은 시스템이 청년들에게서 실패를 통해 배울 기회 자체를 빼앗아버렸다고도 볼 수 있다.
-요즘 청년들이 안정지향적이라는 평가도 있는데.
△유치원부터 영어 단어 외우고 수학 선행하면서 오로지 기술·지식 역량 교육에만 집중해왔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내가 왜 사는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인문학적 사고가 형성될 틈이 없었다. KAIST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기술 역량 쪽으로는 정말 뛰어나지만 실패해본 경험이 없고 조금만 실패해도 충격을 크게 받는다. 그 학생들이 느끼는 건 한마디로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이다. 자기 인생의 비전과 목표 의식이 형성되지 않았으니 모든 게 막연하게 불안할 수밖에 없다.
-연구개발(R&D) 현장에서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데 대한 지적이 많다.
△연구자들이 어려운 연구를 안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최종 보고를 할 때 언제나 완성도가 100%인 것처럼 리포트가 돼야 하는 구조가 문제다. 결국 연구자들은 될 만한 이야기만 제안서에 적고 안 될 가능성이 보이면 중간에 숨긴다. 실패를 드러내면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것은 실패 사례가 국가 자산으로 남지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예산을 써서 기술을 시도했는데 왜 막혔는지 후속 연구자가 제대로 공유받지 못한다. 실패를 비용이 아닌 정보의 축적으로 인식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미국이나 유럽의 연구기관들은 실패 프로젝트를 별도 아카이브로 관리해 실패 보고서가 다음 연구자의 출발점이 된다.
-우리 정부도 ‘실패 박람회’ 같은 시도를 한 적이 있는데.
△안타까운 점은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좋은 것들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모두 바꿔버린다. 이런 것은 정책이나 법으로 강제해서 바꿀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패를 바라보는 문화를 바꾸는 건 결국 사람이다. 정책입안자 등 사람의 사고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점진적으로 사례들이 쌓이고 알려지면 자연스럽게 문화가 변화하는 방향으로 갈 것으로 본다.
- ‘좋은 실패’와 ‘나쁜 실패’의 차이는.
△토머스 에디슨이 수천 번 실패했을 때 ‘나는 안 되는 케이스를 하나 발견했을 뿐’이라고 했다. 결국 실패는 되는 사례 하나를 찾아내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그게 좋은 실패라면 나쁜 실패는 자기 비전과 목표 없이 수동적으로 하다가 스트레스만 받고 그 안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이다. 나쁜 실패는 결국 자신이 어떤 일을 포기할 때 결정되는 것이다. 도전이 계속되는 한 실패를 쉽사리 규정할 수 없다.
-서울대 공대에서도 최근 ‘실패 연구’에 자금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잘된 일이다. KAIST뿐 아니라 국내 대학들, 나아가 기업과 공공의 영역으로 이런 문화가 퍼져나가는 게 중요하다. 실제로 지난 5년간 기업들과 공공기관에서도 연락이 많이 왔다. 강연을 많이 다녔고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실패 사진전 같은 것을 열기도 했다. 이런 사례들이 쌓이고 알려지면서 문화가 자연스럽게 바뀌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방향이다.
-AI 시대엔 인간의 실패가 더 줄어들 수 있지 않나.
△오히려 그 점을 경계하고 있다. AI가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효율을 높이면 인간의 불편함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인간 문명의 위대한 유산들은 모두 ‘불편함’과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고난이 없는 환경에서 인간은 동기부여를 얻기 힘들다. AI가 손쉽게 모든 답을 준다면 인간은 실패를 통해 배우는 힘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미래 사회에서는 실패를 관리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인간만의 정신적 역량이 더 빛을 발할 것으로 본다.
-새로운 대국민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다던데.
△조만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AI 실패 공모전’을 선보일 계획이다. 앞으로 10년 후 AI 때문에 어떤 실패가 일어났다는 상황을 상상해서 제안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년 후 초등학생들의 문해력이 지금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를 현재부터 거꾸로 추적하는 식이다. 취지는 AI에 대해 긍정적인 면만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인문사회학적 관점에서 AI의 미래를 상상해보고 미연에 잘못된 방향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실패연구소가 궁극적으로 한국 사회에 남기고 싶은 변화는 무엇인가.
△개개인이 자기 비전과 목적의식을 스스로 갖고 나아갈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성이 보장되고 포용되어야 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문화가 자리 잡히고 한 명 한 명이 자기의 비전을 갖게 되면 한국은 분명히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실패연구소가 KAIST를 넘어 한국 사회 전체가 ‘실패할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밑거름을 만들고 싶다.
◆ He is…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 상문고와 서울대 기계공학부를 졸업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에서 기계공학 석사, 전자전산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MIT미디어랩의 포닥(박사후연구원)을 거쳐 KAIST 전산학부 전임 교수와 AI컴퓨팅학과·AX학과·반도체시스템학과· KI인체증강연구소 겸임교수를 지내고 있다. 한국인공지능학회·한국소프트로봇공학회 이사, ㈜커브컴퍼니 사외이사로도 활동 중이다. 지난해에는 실패연구소 활동을 담은 책 ‘실패 빼앗는 사회(공저)’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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