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80년 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주와 주변 지역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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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 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또는 5·18 민주화 운동(五一八民主化運動) (약칭: 5·18)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대한민국 광주시전라남도 일대에서 발생한 시민 중심의 민주화 운동이었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 이후 대한민국 내 권력을 확대하던 하나회와 신군부는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에 대처하기 위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대한민국 전역으로 확대하고, K-공작 계획충정훈련을 통해 민주화 운동을 조직적으로 분쇄하고자 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의 일부
5·18 민중항쟁추모탑
날짜1980년 5월 18일 ~ 1980년 5월 28일
지역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주시 및 주변 지역[a]
원인
목적신군부 정권 퇴진
종류집회, 무장 투쟁, 파업
결과신군부의 승리
시위 당사자
시민군

육군특수전사령부

대한민국 육군

대한민국 경찰


주요 인물
참여 인원
  • 시위대 20만명~30만명[2]
사상자
피해 참조
사망: 27명
군인 23명
경찰 4명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0년 5월 18일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계엄령에 맞서 시위를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광주에 있던 전라남도경찰청 소속 경찰들이 시위 해산을 주도했으나, 신군부의 계획에 따라 광주에 육군특수전사령부 소속 제7공수특전여단 제33대대 및 제35대대가 계엄군으로 투입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를 진압하면서 시위대를 향해 구타와 폭행을 가했고, 일부 시위대는 진압 과정 중 사망했다. 진압 과정의 폭력성으로 광주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였고, 1980년 5월 20일 수 백 명의 택시 기사들이 버스 기사, 트럭 기사, 자동차 운전수들과 함께 도청을 향해 가두 시위를 진행하면서 시위는 절정에 달했다. 이 시기 계엄군은 시위대 뿐만 아니라 시위 근처에 있었던 행인들을 향해서도 폭력을 가했다.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 집결한 시위대를 향해 계엄군이 발포하면서 폭력이 격화되었고, 시위대는 예비군 무기고와 경찰서로 가서 M1 소총을 들고 민병대를 조직해 계엄군에 저항했다. 같은 날 광주에서의 민주화 운동 소식을 듣고 목포시, 화순군, 나주시, 강진군, 해남군, 완도군, 진도군에서도 광주 민주화 운동에 호응해 민주 항쟁이 발생했다. 5월 22일 계엄군은 광주 외곽으로 철수했으나 광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와 통신을 차단하여 광주를 봉쇄하는 한편, 광주 외곽 지역에서는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민간인 수십 명이 사망했다. 1980년 5월 22일부터 5월 26일까지 시위대는 정부를 상대로 민주 정권 수립 등 다양한 요구를 전달하고 자체적으로 광주의 치안을 유지했다. 그러나 정부는 시위대의 요구를 묵살하고 1980년 5월 27일 광주에 재진입해 저항하던 시민군을 진압하고 광주를 점령했다. 광주에서 저항은 끝났지만, 목포에서는 1980년 5월 28일까지 신군부에 맞선 민중 항쟁이 이어졌다.

광주 민주화 운동 직후 전두환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1980년 5월 31일 수립하고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같은 해 8월 16일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을 축출하고 8월 17일 대선을 치른 뒤 9월 1일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전두환 정부 기간 동안 5·18에 대한 언급은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이적 행위로 분류되어 처벌받았고, 광주 민주화 운동은 북한의 지원을 받은 공산 세력의 폭동으로 규정되었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신군부 세력이 몰락하고, 1993년 노태우의 뒤를 이어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국가의 시선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1995년 12월 21일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광주 유혈 진압을 주도했다고 보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구속되고 진압 가담자들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졌다. 1997년 5월 16일 대한민국 정부의 지원 하에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희생된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해 광주광역시는 망월동묘지에 묻혀 있던 피해자의 유해를 운정동으로 옮기고 국립5·18민주묘지를 건립했다. 같은 해 5월 18일은 대한민국의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이후 김대중 정부 시기인 2002년 1월 26일 '광주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이 제정되어 광주 민주화 운동의 피해자들이 국가유공자로 대우받게 되었다.

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5·18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받고 있으며,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인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비롯한 다양한 예술 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세계적으로도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0년대 후반 태국, 베트남, 필리핀, 중화인민공화국, 미얀마 등지의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으며, 2011년 유네스코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가치와 의미를 높이 평가하여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기록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광주광역시에는 총 32개의 5·18 사적이 있으며,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을 건립해 광주 민주화 운동의 실상을 전달하고 있다.

명칭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5·18 민주화운동, 5·18, 광주항쟁(光州抗爭), 광주학살(光州虐殺), 광주사태(光州事態), 광주민중봉기(光州民衆蜂起), 광주시민항쟁(光州市民抗爭)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명칭은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1일에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광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다."라고 군부 발표에서 언급한 것이 처음으로, 이후 신군부와 관변 언론 등에 의해 '광주소요사태' 또는 '광주사태' 등으로 보도되면서 일반화되었다.[3][4] 이는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을 "불순분자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 사태"로 왜곡한 신군부의 주장에 근거한 호칭으로 제5공화국 기간 내내 사용됐으며, 현재는 당시 호칭에 익숙한 노년층이나 신군부를 지지하는 일부 극우 인사들이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현재의 명칭인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화 직후인 1988년 3월 24일, 노태우 정부 산하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면서 나왔다.[5] 이후 국회 진상조사특위가 구성될 당시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측에서는 "민주화투쟁"이라는 명칭을 주장했으나, 노태우가 총재, 전두환이 명예 총재를 맡고 있던 집권여당 민주정의당은 '투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경우 투쟁의 대상인 신군부의 책임이 불거질 것을 우려하여 "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고집하였다.[6] 결국 이에 통일민주당 측이 타협하면서 "민주화운동"으로 합의되었다. 이후 문민정부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계승"을 자처하고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는 등 정부에서 "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함에 따라 공식 명칭으로 자리잡았다.

한편, 신군부군사독재폭력에 맞선 민중항쟁을 광주 민중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항쟁'도 지역 사회와 5월 단체 등이 중심으로서 1980년대부터 사용됐다.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딴 '5·18'도 널리 통용되는 명칭이다.

배경

신군부의 정치 권력 장악

1979년 10·26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뒤, 같은 해 전두환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였고 실권자로 떠올랐다. 1980년 초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K-공작 계획을 실행하여 언론을 조종·통제하기 시작했다. 전두환은 같은 해 4월 14일에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돼 대한민국 내의 정보 기관을 모두 장악했다.

1980년 5월에 초순경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에서는 국회와 내각을 무력화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로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국가보위 비상기구를 설치해 신군부에 대한 국민의 저항을 탄압하면서 신군부가 정국을 주도하고, 국회 폐쇄와 정치인 체포로 신군부의 안정적인 정국 장악을 담보한다는 것이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한 의도였다.

중앙정보부는 일본 내각조사실의 첩보를 토대로 5월 10일에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 '북괴남침설'을 작성했고,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는 5월 11일에 '북괴남침설'과 같은 첩보는 가치가 없다고 결론 내린 상황이었다.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5월 13일에 '북괴남침설'은 근거가 없으며, 전두환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해 흘린 구실이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같은 날에 미국은 '북괴남침설'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입수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8] 훗날 남침설을 제보했다고 알려진 당시 일본의 내각 조사실 한반도 담당반장은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말한 적도, 그런 정보도 없었다."라고 밝혀 신군부가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악용했던 '북괴남침설'은 신군부로 말미암아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9]

한편 같은해 5월 중순부터 정부와 국회에서는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고 있었다. 5월 12일에 신민당공화당 양당 총무들은 개헌안을 접수하였고, 비상계엄 해제 등의 정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5월 20일 10시 임시국회의 소집을 공고했다.[10] 같은날 신현확 총리는 국회와 협의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개헌 일정을 앞당긴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11]

민주화 운동의 확산

전개

광주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던 전남도청 별관

사건 초기

5·17 조치 이전 계엄반대시위

5월 15일 자 광주에서는 오후 4시에 대학생 3만여 명이 도청 앞에 모여 복학생 대표 정동년이 시국선언문을 낭독하는 등 대규모 시가지 가두행진을 벌였다. 학생 지도부는 학생들에게 휴교령을 내리면 16일 오전 10시에 학교 정문 앞에 모여 시위를 벌인 다음에 정오에 도청 앞 분수대로 집결하라는 시위 방침을 시달했다.[12] 5월 17일 오후 9시, 신군부 세력의 압력으로 개최된 비상국무회의는 비상계엄령을 내리도록 의결했다. 보안사령부는 오후 10시 경에 야당 인사인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체포 감금했고,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국회를 점령해 국회의 기능을 마비시켰다. 이날 자정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동시에 계엄포고령 제10호가 선포돼 대학휴교령·보도검열강화·정치활동금지 등의 조치가 내려졌다.[7] 새벽 2시 제7공수부대는 조선대학교전남대학교를 점령했다. 공수부대원들은 각기 조를 편성해 광주 시내 각 학교의 입구를 지키고 검문 검속했다.[13]

대학생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5월 18일 당일 아침 9시 이후, 텔레비전 방송, 라디오, 신문을 통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 소식이 보도됐다. 전남대학교 학생 100여 명은 18일 오전에 교문 출입을 저지하는 공수부대원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14], 이로 인해 공수부대 측에서 부상자가 발생하자, 이에 분개한 공수부대원으로 말미암아 학생들은 구타를 당했고,[15] 일부 학생들은 금남로로 이동했다. 전남대 학생 300여명은 가톨릭회관에 집결해 시위했다. 이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을 시도했다.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

신군부는 신속하고 강력한 시위진압을 위해 5월 18일 오후 4시에 제7공수여단을 시내에 투입했다.[16] 제7공수여단은 시위 학생이 아닌 일반 행인들에게도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이에 학생들은 반발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했으나 계엄군이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과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했다.

전개 과정

광주 시민의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19일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생 중심이던 시위에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들과 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19일 오후 시위에 참가한 시민은 최소 3천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계엄군의 진압은 가혹하게 변했다. 공수부대는 학생, 시민, 남녀노소, 행인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가했다. 20일 시위대의 규모는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광주 시내 택시, 일부 시내·시외 버스 200여 대가 계엄군의 진입로를 가로막기도 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을 진압봉이나 총의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고 옷을 벗기는 등 과격진압을 자행했다.[17] 일부 시민들이 공수부대의 지휘를 맡고 있던 전투교육사령부를 찾아가 직접 항의를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보안사의 통제를 받던 언론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격분한 시위대는 광주 MBC 방송국을 방화했다. 20일 24시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최초의 집단 발포를 가했다.[13] 발포 이후 2군 사령부로부터 발포금지와 실탄 배분 금지 명령이 떨어졌지만, 11공수여단은 이를 무시하고 실탄을 분배했고, 다음날인 5월 21일에는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연결됐다.[18]

계엄군의 발포 및 광주 시민 학살

5월 21일 오전에 전남도청전남대학교 앞에서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시민 대표는 21일 오전에 계엄군과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렬됐다. 전남도지사는 헬기에 타고 확성기로 21일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러나 공수부대 철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21일 정오 12시경 전남대 앞·21일 오후 1시경 당시 전남도청 앞)를 시작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도청 집단 발포 이후,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 빌딩·수협·광주관광호텔 등에 4인 1조로 올라가 조준사격을 가했고, 수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17] 이 날 광주시내 120여 개의 병원과 보건소·3개의 종합병원 등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상자들이 몰려들었다.

광주 시민의 항쟁

집단 발포가 일어난 21일 오후부터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전라남도 나주시, 화순군 지역에서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해, 시민군을 결성했다. 시민들은 광주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인 아시아자동차로 몰려가 차량을 탈취했다. 일부 시민군은 260여 대의 차량을 몰고 나주와 화순 등으로 외부에 광주의 소식을 알리러 떠났다. 총과 실탄, 폭약 등 각지에서 탈취된 무기는 시민들에게 분배됐다.

계엄군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했다. 시민군은 21일 저녁에 계엄군이 물러난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21일 저녁,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정도영 준장은 자위권 발동을 경고하는 담화문을 계엄사령관 이희성에게 전달했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오후 7시에 보안사에서 전달한 자위권 발동 경고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희성은 광주 지역의 시위를 '광주사태'로 명명하고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묘사했다.

다음은 그 담화문의 전문이다.[19]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본인은 오늘의 국가적 위기에 처하여 국가 민족의 안전과 생존권을 보유하고 사회 안녕질서를 유지해야 할 중대한 책무를 지고 있는 계엄사령관으로서 현 광주시 일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비극적인 사태를 냉철한 이성과 자제로써 슬기롭게 극복해 줄 것을 광주시민 여러분의 전통적인 애국심에 호소하여 간곡히 당부코자 합니다.

지난 18일 수백 명의 대학생들에 의해 재개된 평화적 시위가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지역 불순 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 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 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 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 행위를 선도한데 기인된 것입니다.

이들은 대부분이 이번 사태를 악화시키기 위한 불순 분자 및 이에 동조하는 깡패 등 불량배들로서 급기야는 예비군 및 경찰의 무기와 폭약을 탈취하여 난동을 자행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들의 극한적인 목표는 너무나도 자명하며 사태의 악화는 국가 민족의 운명에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 명약관화한 것이 사실입니다.

본인은 순수한 여러분의 애국 충정과 애향심이 이들의 불순한 지역 감정 유발 책동에 현혹되거나 본의 아니게 말려들어 돌이킬 수 없는 국가적 파탄을 자초하는 일이 없도록 조속히 이성을 회복하고 질서 유지에 앞장서 주시기 바라며 가정과 지역의 평화적 번영을 위하여 각자 맡은 바 생업에 전념해 주시기를 충심으로 당부하는 바이며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경고
  1. 지난 18일에 발생한 광주 지역 난동은 치안 유지를 매우 어렵게 하고 있으며 계엄군은 폭력으로 국내 치안을 어지럽히는 행위에 대하여는 부득이 자위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2. 지금 광주 지역에서 야기되고 있는 상황을 볼 때 법을 어기고 난동을 부리는 폭도는 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다수의 주민 여러분은 애국심을 가진 선한 국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선량한 시민 여러분께서는 가능한 한 난폭한 폭도들로 인해 불의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거리로 나오지 말고 집 안에 꼭 계실 것을 권고합니다.
  3. 또한 여러분이 아끼는 고장이 황폐화되어 여러분의 생업과 가정이 파탄되지 않도록 자중자애하시고 과단성 있는 태도로 폭도와 분리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계엄군의 치안 회복을 위한 노력에 최대의 협조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1980년 5월 21일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이희성

광주외곽봉쇄작전

1980년 5월 21일 19시 30분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작전지시 80-5호)가 계엄사령부로부터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내려져 광주시내로부터 철수한 계엄군은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했다. 5월 21일 21시 30분 광주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에 방어적 발포를 승인하는 자위권 발동이 고지되고, 실탄이 분배되기 시작하면서 계엄군이 무차별 발포에 나서는데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20] 광주외곽봉쇄작전이 실시되는 동안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 송암동 학살을 비롯한 시민 살상 행위가 광주 외곽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5월 24일에는 계엄군 간 2차례 오인 교전이 일어나 계엄군 13명이 사망했다.

광주 시민의 자치

22일 이후로 광주는 군인들게 완전 포위·봉쇄당했다.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됐고, 전국 각지에 온갖 유언비어가 확산됐다. 외신기자들에 따르면 계엄군이 물러가고 시민군이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자치질서를 찾아가고 있었다.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계엄의 해제와 자유 민주화 요구 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자유 민주화 시민군 대표를 조직해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시민군 자체적으로 무기를 회수하고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은 높은 시민정신과 도덕성을 보여주었다. 다함께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헌혈 행렬이 이어지고 행정력과 치안력 공백상태에서도 큰 사건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광주의 상점가, 금융기관, 백화점에서 단 한 건의 약탈도 없었다.[21] 시민 자치 기간에도 광주 시민의 협력으로 행정기관의 역할이 상당 부분 유지됐다. 당시 전라남도 부지사 정시채를 비롯한 공무원도 전남도청에 정상 출근했다. 공직자들은 5·18 당시 양곡 방출이나 부상자 처리 등의 행정업무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22][23] 이 기간은 '광주해방구' 또는 '해방광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부 지식인들은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 당시 광주를 프랑스 시민들의 자치가 시행된 파리 코뮌 당시의 파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평화집회

'해방광주'로 불리는 동안 일부 시민들은 스스로 계엄사에 무기 자진 반납을 했으나 일부 시민들은 지속적인 투쟁을 주장하며 계속 무장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수차례에 걸친 내부 대책회의와 협상 끝에 계속 무장을 해야 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평화적 시위는 계속됐고 〈애국가〉와 〈울 밑에선 봉선화〉 등을 부르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평화집회를 계속하고 있었다. 광주 시민은 "김일성은 오판 말라"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24]

광주 재진입 작전

5월 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이 시작됐다. 5월 27일 새벽 2시에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아침, 전라남도 도청에서 일방적으로 1만여 발을 사격해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살상했다. 도청 내 일부 시민군은 자진 투항하자는 의견과 결사항쟁 의견으로 나뉘었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채 날이 밝으면서 계엄군이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시민군 생존자를 체포·연행했고,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미국 측의 반응

대한민국 측은 5월 18일 0시에 시작된 비상계엄 확대 선포 2시간 전에 갑작스럽게 이를 미국에 통보했다. 미국은 한국군 당국이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대학과 국회를 폐쇄하려는 의도를 사전에 알지 못했다. 미국은 5월 18일 오전에 서울과 워싱턴에서 계엄령 실시에 강력하고 맹렬하게 항의했다.[25]

계엄사령부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동원한 특전사 부대나 20사단 부대는 광주에 투입될 당시나 광주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는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 아래에 있지 않았다. 그 기간에 광주에 투입되었던 한국군의 어느 부대도 미국의 통제 아래에 있지 않았다. 특전사령부 예하 여단은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었던 적이 없다. 20사단의 경우, 10·26 사건에 뒤따를 혼란에 대비한다는 대한민국 측 요청에 따라, 10월 27일에 20사단 포병대와 예하 3개 연대의 작전통제권이 한미연합사에서 대한민국 육군으로 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특전사 부대가 광주에 배치된 것을 사전에 몰랐으며, 작전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했다.[25]

미국 측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초기에 방관적이었다. 5월 18일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에 주한미대사관으로부터 미국 국무부로 타전된 전문에서는 광주에 대한 언급이 없다. 5월 20일까지만 해도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미국 측의 인식은 막연한 소문에 불과했고, 공수부대의 광주 과잉진압 문제는 서울에서 일어났던 신군부에 의한 정치탄압 사건에 비해 우선 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미국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건 5월 21일부터였다. 이 때는 이미 5·18 민주화운동의 비극의 씨앗이 된, 시위 군중에 대한 강압적인 진압이 이루어진 다음에 특전사 부대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시점이다. 미국은 이후에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평가에서 첫 무력 진압이 이루어진 18일이나 27일의 전면 재진압보다는 5월 21일을 사태의 정점으로 파악하고 있다.[26]

미국은 5월 21일 이후에 신군부와 신군부에 반대하는 대한민국 국민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입장 표명의 압력을 받았는데, 주한 미국 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니어는 워싱턴에 성명서에 포함시킬 항목을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 우리는 광주에서의 시민 분쟁(civil strife)에 경악하고 있음(alarmed)
  • 모든 관련 당사자들이 극도의 자제심을 발휘, 평화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대화를 추진할 것을 촉구함

글라이스틴의 제안대로 이튿날인 5월 22일 오전에 미국 국무부 대변인 호딩 카터는 글라이스틴의 문안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 성명을 발표했으나 언론을 통제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신군부는 미국의 이런 입장이 일반인에게 전달되는 길을 봉쇄해 버렸다. 글라이스틴과 주한 미군 사령관 존 A. 위컴 주니어의 오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군부 측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위컴은 자신은 광주 민주화 운동를 사전에 인지하지 못하였으며, 이 일을 벌인 신군부를 두고두고 비난하였다.[27]

5월 22일 오후, 미국에서 열린 정책 검토 위원회(Policy Review Committee)는 "지금까지 우리가 취해온 행동 이상의 일은 할 필요가 없다는 데에 동의. 우리는 온건한 방법을 선택할 것을 조언했으나, 대한민국 국민이 질서 회복의 필요를 느낄 경우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았음"이라는 광주 상황에 대한 방침을 정했다.[28]

글라이스틴과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는 첫 회동을 5월 23일에 두었다. 글라이스틴은 대한민국 측에 5월 17일 자 계엄령 확대 정책이 미국에 충격을 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 시위를 확고하게 진압하는 것은 필요할지 모르지만 정치 탄압을 수반한 것은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결국 광주에서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는 데 일조한 것이 틀림없다는 견해를 보였다.[29]

피해

망월묘지공원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사망자 및 행방불명자는 약 200여 명이고 부상자 등 피해자는 약 4,300여 명이다. 광주광역시가 2009년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29주년을 맞아 당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을 집계한 결과, 사망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됐다. 이 통계 중 사망자 163명은 유족이 보상금을 수령한 사망자 수이다. 확실하게 신원이 밝혀졌지만, 보상금을 수령받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사망자는 165명 이상으로 늘어난다.[30][31] 검찰은 1994년에 사상자 수를 발표했지만,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와 같은 핵심 쟁점이 밝혀지지 않으면서, 5·18이 발생한 지 한 세대가 지나도록 이 문제는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5·18 민주화 운동 관련 보상자 통계를 보면, 사망자 240명, 행방불명자 409명, 상이 2,052명 등 총 7,716명이 보상금을 신청했으며, 이 중 인정된 보상자는 사망자 154명, 행방불명자 70명, 상이 1,628명 등 총 5,060명이다. 보상금 수령자 총 5,060명 중 중복 지급자 698명을 제외할 경우, 보상금 수령자는 4,362명이다.[32]

희생자(사명자) 연령별/직업별 현황[33]
연령별 사망자 직업별 사망자
연령 희생자 직업 희생자
14세 이하 8명 학생 27명
15-19세 36명 자영업 21명
20대 73명 회사원 14명
30대 26명 방위병 2명
40대 9명 공무원 2명
50대 6명 운전사 11명
60대 4명 직공 34명
확인불가 1명 무직 34명
163명 145명

진압군 부대 지휘관들은 1988년 광주 청문회 당시에 암매장이 없었다고 진술한 것과 다르게, 진압에 참가했던 공수부대원으로 말미암아 2001년 당시에 공수부대원이 비무장 민간인을 사살, 암매장했다는 양심선언이 발표됐다.[34]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경찰 및 군인 중 사망자는 경찰 4명, 군인 22명으로, 이들은 1980년 6월 21일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1988년 7월, 국회 5.18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에 제출된 국방부 답변자료에서 확인된 바에 따르면, 당시 민간인 사망자 가운데 14세 이하의 어린이가 8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나이 가장 어린 사망자는 4세 가량의 남자 어린이로서 1980년 5월 27일 자로 목에 관통상을 입어 숨졌으며,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당시에 계엄군이 어린이들에게까지 총을 겨눴다는 사실이 드러나, 5.18 유족회 측이 학살자들에게 단호한 처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3]

5·18 민주 유공자 유족회와 부상자회, 5·18 기념재단 등 4개 단체가 공식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5·18 사망자는 모두 606명으로, 이 가운데 165명은 항쟁 당시에 숨졌고, 행방불명이 65명, 상이 후 사망추정자는 376명 등이다.[35]

1980년대 중반에는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과 무차별적인 연행으로 인해 사망자가 2천여 명에 달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실제로 5·18 종료 직후에 정부에 신고된 사망추정자, 실종추정자는 2천여 명에 달했고, 일부 학생운동권이 이를 인용한 주장을 제기했다. 이에 윤성민 국방부 장관은 1985년에 1980년 당시의 사망자 및 실종자로 신고된 인원은 2천 명이 맞는다면서, 그중에는 체포 구금된 자, 사망자, 부상 입원자, 피신자도 포함돼 있어, 이들 인원이 사망자로 잘못 전파된 것이라고 답했다.[36]

5·18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지금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고 있다. 연구진은 5·18 유공자 중 부상자와 구속자들이 정당한 이유 없이 신체적·정신적 폭력을 겪은 인권침해 피해자들과 유사한 외상을 경험한 만큼, 상당수가 PTSD 증상을 호소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연구를 진행한 오수성 전남대 교수는 "5·18 체험자들은 지금도 만성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고 있다. 당시의 충격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재경험하며 우울증, 불안장애, 알코올 의존 증상까지 함께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의 기억으로 인해 반복적인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는 사례도 이어지고 있다.

고령화가 본격화되며 관련 사망자가 점차 증가하는 가운데, 당시 입은 신체적 부상과 정신적 후유증이 수십 년에 걸쳐 건강 악화에 영향을 미친 사례도 적지 않아, 5·18의 상처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역사임을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온다.

연행자 고문 피해

5·18에서 3천여명에 달하는 수많은 시민이 계엄군으로 말미암아 폭행 당하고 트럭에 실려 광주교도소·상무대에 연행됐다. 연행자는 영창으로 넘겨지기 전에 보안대에서 온갖 고문을 당했다. 5·18과 사실상 연관이 없는 김대중과 관련하여 내란음모 조작이라는 각본 수사가 이루어졌다. 김대중에게서 자금을 얼마 받았느냐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며, 잔인한 고문, 구타, 심지어 같은 동료끼리 때리게 하는 비인격적 모독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폭거를 자행했다. 고문이나 구타를 당한 사람들은 석방이 된 뒤에도 오랜 시일 동안에 후유증에 시달려 정상적인 생활을 못 했고, 정신질환을 앓다가 사망했다. 이들은 풀려난 뒤에도 엄청난 공포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37]

정동년은 "보안대 조사관들이 잠을 재우지 않고 조사를 하면서 무릎 사이에 곤봉을 끼우고 밟고 군홧발로 짓이기는 등의 고문을 자행했다."라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또한 그는 "경찰이나 중앙정보부처럼 기술적인 고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보안대 조사관들이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연루 사실을 조작하기 위해 무지막지한 고문을 했다."라며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라고 말했다.[38]

한국인권의료복지센터 부설 '고문 정치폭력 피해자를 돕는 모임'은 1980년 5·18 당시에 연행됐었거나 구금됐던 피해자가 1인당 평균 9.5회의 고문을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중 물고문, 매달기, 구타, 비생리적 자세 강요, 강제 급식, 밥 굶기기, 의료 기회 박탈 등 신체적 고문이 62%를 차지했다. 수면 박탈, 복종 강요, 지각 박탈(암실 가두기) 등 심리적 고문은 38%를 차지했다.[39] 피해자들의 55.8%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경험하고 있으며, 자살자 비율은 10.4%인 것으로 확인되었다.[40]

영향과 평가

추모탑 (국립 5·18 민주 묘지)

광주 민주화 운동은 끝내 전두환 정권으로 말미암아 진압당했지만,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1987년 6월 민주항쟁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전두환 정권의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미국한국전쟁 때 같이 싸운 혈맹관계로 이해하던 종래의 대미관과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도 당시 운동권을 중심으로 재고됐다.

계엄사령부는 1980년 7월 4일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발표했다. 서울의 학생시위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이 조종했다는 명목으로 김대중과 민주화 운동가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이는 후에 신군부가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대중 등은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미국의 강력한 사면 요청에 따라 감형됐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김대중의 사주에 의해 발생한 소요사태로 조작했다. 하지만 1988년5공 청문회를 거치고 국회에서 1995년 12월 21일에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해, 계엄군의 진압 과정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피해 배상을 위한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1995. 12. 21.)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7. 12. 17.)이 제정[41] 되면서 전두환 정권의 비(非)민주성과 폭력에 맞서 싸운 민주화 운동으로 다시 평가받았다.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광주학살 책임자들은 서훈이 취소됐으며 그 자격도 박탈됐다. 이 사건의 핵심 관련자인 전두환, 노태우는 1997년에 대법원으로부터 징역형과 2천억 원이 넘는 추징금을 선고받았다.[41] 2018년 7월 10일, 행정안전부는 '부적절한 서훈 취소(안)'을 심의·의결하여 5·18 진압 관련자에게 수여된 대통령 표창 5개와 국무총리 표창 4개를 취소하였다. 과거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훈·포장 68점은 모두 취소되었지만, 표창은 관련법이 없어서 대통령령인 '정부표창규정'의 개정을 통해 취소 근거를 마련하였다.[42]

5·18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록물은 2011년 5월 25일에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 심의를 통과함에 따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결정됐다.[43][44]

5·18 민주화 운동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 유산 등재가 최종 심사 결과만을 남겨 두고 서석구, 지만원 등 극우 인사는 5·18이 북한군의 학살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네스코 본부에 반대 청원서를 제출했다.[45] 유네스코는 국내외 검증 절차를 거쳐 '북한군 개입설'이나 '폭동설' 등은 허위라고 결론짓고 2011년 5월 25일에 심사위원 14명의 만장일치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46]

유네스코는 5·18 민주화 운동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전환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를 이루는데 기여했으며, 나아가 냉전 체제를 깨트리는데 도움을 줬다고 평가했다.[47][48][49]

편철 4,271권, 8,580,904페이지, 네거티브 필름 2,017컷과 사진 1,733장, 영상 65작품, 1,471명의 증언, 유품 278점, 연구물 411개, 예술작품 519개 등[50]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5·18 관련 기록물은 다음의 9개 주제로 구분되어 있다.

  1. 국가기관이 생산한 5·18 민주화 운동 자료(국가기록원, 광주광역시 소장)
  2. 군 사법기관 재판 자료,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자료(육군본부 소장)
  3. 시민들이 생산한 성명서, 선언문, 취재수첩, 일기(광주광역시 소장)
  4. 흑백필름, 사진(광주광역시, 5·18기념재단 소장)
  5. 시민들의 기록과 증언(5·18기념재단 소장)
  6. 피해자들의 병원 치료 기록(광주광역시 소장)
  7. 국회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 규명 회의록(국회도서관 소장)
  8. 국가의 피해자 보상 자료(광주광역시 소장)
  9. 미국의 5·18 관련 비밀해제 문서(미국 국무성, 국방부 소장)

강운태 광주시장은 2011년 9월 4일에 기자회견을 두고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31년 만에 국제적으로 공인된 쾌거."라며 "5·18 민주화 운동이 헌법전문에 명시되도록 추진하겠다."라고 밝혔다.[51]

관련 판결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사회 각계각층에서 불법적으로 집권한 신군부 인사를 고소·고발했다. 검찰은 1995년 7월에 5·18 사건에 대해 전두환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정국을 장악할 의도가 있었고 무고한 시민이 희생된 것이 확인됐지만,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라는 논리로 내란죄·반란죄 여부를 따지지 않고 불기소 처분했다. 헌법재판소는 1995년 12월에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라는 취지의 인용 결정을 내렸다. 같은 달 검찰에 특별수사부가 설치돼 12·21 사건과 5·18 사건 재수사에 나섰고, 국회에서 5·18 특별법을 제정해 12·12 사건, 5·18 사건 공소시효 정지 규정을 두었다. 5·18 사건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인 1996년 1월 23일, 검찰은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을 전격적으로 기소했다.

대법원은 1997년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및 다른 피의자들이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했다. 이에 따라 전두환은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 원, 노태우는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김대중 정권에 의해 징역형은 사면됐으나, 추징금은 현재까지 내지 않고 있다.[52]

또한, 광주 민주화 운동의 관련자를 숨겨준 천주교 신부에게 정당행위를 부정, 범인은닉죄로 처벌한 판례(1983년)가 있다. 이회창 대법관이 참여한 재판이며, 황인철 변호사 등이 변호한 사건이 있다.[53][54]

5·18 사건 대법원 판결

1997년, 대법원은 성공한 쿠데타의 가벌성에 "피고인들의 정권장악을 통해 새로운 법 질서를 수립한 것으로 볼 수 없고, 우리의 헌법 질서 하에서는 헌법에 의한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한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라고 분명하게 적시했다. 또한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사실 관계를 다음과 같이 확정지었다.[55]

피고인들이 국헌을 문란케 할 목적으로 시국수습 방안의 실행을 모의하고, 모의할 당시 그 실행에 대한 국민들의 큰 반발과 저항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해 '강력한 타격'의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하도록 평소에 훈련된 공수부대 투입을 계획한 후, 이에 따라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진압봉이나 총 개머리판으로 시위자들을 가격하는 등으로 시위자에게 부상을 입히고 도망하는 시위자를 점포나 건물 안까지 추격해 대량으로 연행하는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하였으며, 이와 같은 난폭한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분노한 시민들과의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서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함으로써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그후 일부 시민의 무장저항이 일어났으며, 나아가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귀중한 국민의 생명을 희생하여서라도 시급하게 재진입작전을 강행하지 아니하면 안될 상황이나 또는 광주시민들이 급박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있다고도 볼 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위를 조속히 진압하여 시위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아니하면 내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계엄군에게 광주 재진입작전을 강행하도록 함으로써 다수의 시민을 사망하게 하였다.[55]

같이 보기

참고

내용주

각주

  1.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진 (2022년 10월 31일) [2004]. 07. 현대 2판. 전면개정판 아틀라스 한국사. 경기도 파주시. 232~233쪽.
  2. Gwangju Uprising. Encyclopaedia Britannica. 2026년 3월 11일에 확인함.
  3. 노컷뉴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4. 해외촛불 파도타기, 다시 타올랐습니다 - 오마이뉴스
  5. 1 2 5·18사건 재수사 종결, 내일 기소 조선일보 1996년 1월 22일
  6. 광주항쟁 30년 광주가 우리에게 묻는 것 - 남은 자의 과제
  7. "일본 커넥션 - 쿠데타 정권과 친한파"
  8. 네이버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9. 정부 개헌일정 2~3개월 단축[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동아일보 1980년 5월 12일
  10. 검찰이 밝힌 광주시위와 진압 전말
  11. 1 2 80년 5월의 광주…그날 무슨일이 서울신문 2010년 5월 17일
  12. <全.盧씨등 8명 공소장 전문>-4 연합뉴스 1996년 1월 23일
  13.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5·18 관련 사건 수사결과>, 58쪽 , 1995. 7. 18.
  14. 5·18 상황일지. 2010년 8월 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9월 11일에 확인함.
  15. 1 2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충정작전1이라는 이름을 가진 ref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16. 5ㆍ18 유혈진압 치밀하게 준비
  17. 동아일보 (1980년 5월 22일). 理性회복 질서유지를" 李戒嚴사령관 光州사태에談話.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18.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 사건 진상조사결과 보고서 외곽봉쇄 과정에서의 민간인 살상 (93쪽 ~ 94쪽)
  19. 광주생업질서 서서히 되찾아가[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0. "5·18 당시 행정기관의 역할 유지됐다"
  21. 5·18 당시 완전 행정공백 상태 아니었다
  22. "권력은 힘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 2013년 12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12월 12일에 확인함.
  23. 1 2 1980년 5월 대한민국 光州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미국정부 성명서
  24. 광주민주화운동 발발과 미국의 오판 신동아
  25. 광주민주화운동 발발과 미국의 오판 신동아
  26. 광주민주화운동 발발과 미국의 오판 신동아
  27. 광주민주화운동 발발과 미국의 오판 신동아
  28. 5·18 미완의 과제…관련자료 공개돼야
  29. 경향신문 [어제의 오늘]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30. 출처는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보관됨 2013-06-12 - 웨이백 머신
  31. 1 2 연합뉴스 (1995년 12월 7일). 5.18당시 사망자중 14세 이하 8명. 2013년 1월 12일에 확인함.
  32. [공수부대원 양심선언] "5·18때 민간인 사살 암매장"
  33. '5·18 사망자 606명'…통계자료 발표 노컷뉴스 2005년 5월 13일자 기사
  34. 광주사태 사망, 발표대로 191명[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1985년 6월 7일 동아일보 1면
  35. '아직도 5·18'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36. 5·18 당시 민주인사 고문 현장 '원형 보존'
  37. 5·18 수형 피해자 "평균 9.5회 고문당해"
  38. 기념재단 용역보고회 "피해자 절반 외상후 스트레스" 자살자만 42명…시범프로그램서 분노조절 등 효과 보관됨 2014-02-02 - 웨이백 머신 한겨레 신문 2012.03.28.
  39. 1 2 현대호 (2006년 12월 1일). 광주민주화운동. 나라기록포털. 국가기록원. 2011년 11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21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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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박바른, 5·18운동, 유네스코 등재 '임박'…보수단체 저지[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스포츠서울, 2011년 5월 13일
  44. 5·18, 유네스코 첫 세계인권교과서에 실린다 동아일보, 2013년 5월 20일
  45. http://www.unesco.org/new/en/communication-and-information/flagship-project-activities/memory-of-the-world/register/full-list-of-registered-heritage/registered-heritage-page-4/human-rights-documentary-heritage-1980-archives-for-the-may-18th-democratic-uprising-against-military-regime-in-gwangju-republic-of-korea/
  46. 강현석, 유네스코 “5·18, 아시아 민주화·냉전 해체에 기여”, 경향신문, 2013년 5월 22일
  47. 구길용,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책자 5·18의미 첫 공개, 뉴시스, 2013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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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구길용, "5·18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 선포…헌법 전문 명시 추진", 뉴시스, 2011년 9월 4일
  50. 당시 대법원 판결문
  51. 대법원 1983.3.8. 선고 82도3248 판결 【국가보안법위반·현주건조물방화치상·현주건조물방화예비·계엄법위반·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특수공무집행방해·범인은닉·범인도피】
  52. 이회창 총재가 참여한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대법원 상고심 판결문 (요약)
  53. 1 2 12·12 5·18 사건 대법원 판결문

참고 자료

외부 링크